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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없는 존재들: 소수민족과 무국적의 그림자
국적은 단지 여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한 개인이 법적으로 인정받는 존재로서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기반이며, 교육, 보건, 고용, 이동, 재산권 등 모든 권리의 출발점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수백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국적을 가지지 못한 채 ‘법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자’로 살아가고 있으며, 그 다수는 소수민족에 속합니다. 이들은 출생부터 국적을 부여받지 못하거나, 국가의 정책, 내전, 국경 변경 등 복잡한 역사 속에서 시민권을 박탈당하며 무국적자가 됩니다.
대표적인 예로, 미얀마의 로힝야족은 1982년 미얀마 국적법에 따라 시민권을 박탈당한 뒤, 공식적으로 국적 없는 집단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 결과, 이들은 교육과 의료 접근이 차단되고, 자유로운 이동조차 불가능하며, 강제노동과 박해, 집단학살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방글라데시로 피신한 로힝야 난민 수만 해도 100만 명이 넘으며, 그들 대부분은 여전히 법적 보호 없이 난민 캠프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무국적자는 단지 행정상 누락된 존재가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지킬 수 없고, 목소리를 낼 기회조차 차단된 채, 영구적인 불안정 상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특히 소수민족일수록 ‘국가의 국민이 아니다’라는 이유로 더욱 쉽게 배제되고 탄압당하는 구조에 놓이게 됩니다. 따라서 무국적 문제는 인권의 사각지대이자, 국가의 소수민족 차별 구조가 어떻게 제도화되어 왔는지 보여주는 거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도 속 차별: 국적 취득을 가로막는 벽
국적 취득은 단순한 행정절차처럼 보일 수 있지만, 소수민족에게는 매우 복잡하고 불공정한 장벽으로 작용합니다. 많은 국가는 ‘혈통주의(출생자가 부모의 국적을 따라야 함)’ 또는 ‘출생주의(자국 내 출생 시 국적 부여)’에 따라 국적을 결정하지만, 이 과정에서 소수민족은 출생증명서조차 발급받지 못하거나, 부모가 시민이 아니라는 이유로 국적 신청 자체를 거부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태국 내 몽족(Hmong) 공동체는 오랫동안 ‘산악부족’이라는 이유로 시민권을 부여받지 못했으며, 현재에도 수만 명의 무국적자가 존재합니다. 그들은 토지 소유가 불가능하고, 취업에 제한이 있으며, 공공서비스 이용도 제한받습니다. 국적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존재의 가치를 부정당하는 현실이 이들 앞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또한 유럽에서는 로마족(Roma)이 무국적 상태에 빠진 사례도 빈번합니다. 동유럽의 정치 혼란과 국경 재편 속에서 적절한 시민권 등록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로마족은 법적 보호 없이 마을 밖의 공동체로 밀려났습니다.이러한 상황은 정치적, 행정적 배제의 결과이자 의도적인 차별 구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국적을 통해 배타적 정체성을 정의하려는 국가의 논리는, 다양한 문화와 혈통을 가진 소수민족에게는 늘 불리하게 작용합니다. 그리고 이 같은 국적 제한은 국제인권법에 위배되는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국가 주권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며 장기화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무국적이 초래하는 인권 침해의 사슬
국적이 없다는 것은 곧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무국적 소수민족은 각종 인권 침해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며, 차별과 착취, 폭력의 대상이 되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교육을 받지 못하고, 의료를 이용할 수 없으며, 주거와 생계도 보장받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이들은 빈곤, 질병, 범죄의 악순환에 빠지게 됩니다.
예를 들어, 쿠웨이트의 ‘비두인(Bidoon)’이라는 아랍계 소수민족은 국가가 정한 ‘시민 등록’ 시기에 적절한 서류를 제출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수십 년째 무국적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들은 병원에서 치료를 받지 못하고, 대학에도 진학할 수 없으며, 대부분 비공식 노동시장에 종사하면서도 법적 보호는 받지 못합니다. 여성과 아동은 특히 더 취약하며, 학대와 인신매매에 노출될 위험도 커집니다.
또한, 무국적자는 난민보다 더 불리한 처지에 놓이는 경우도 많습니다. 난민은 유엔 난민협약의 보호 대상이지만, 무국적자는 그 자체로 보호의 사각지대에 속하는 경우가 많아, 국외로 도피하더라도 정착과 재난민 신청조차 불가능합니다. 심지어 **출생 등록이 안 된 무국적 아동은 ‘존재하지 않는 아이’**로 간주되어, 교육이나 복지 혜택은 고사하고 유괴, 아동 노동, 성착취의 표적이 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무국적 상태는 개인의 삶 전체를 침묵시키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송두리째 앗아가는 구조적 폭력입니다. 그리고 이 구조는 소수민족이라는 이유로 제도적 배제를 정당화하며, 세계 곳곳에서 묵인되고 있습니다.
국제사회의 역할과 해결 가능성
다행히도 최근에는 무국적자 문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인식이 높아지고 있으며, 유엔을 비롯한 국제기구들은 국적 부여와 인권 보호를 위한 다각적 접근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UNHCR(유엔난민기구)은 2014년 ‘#IBelong 캠페인’을 시작하며 2024년까지 무국적 문제 해결을 목표로 삼았고, 각국 정부와 협력하여 법 개정과 행정 개선을 유도하고 있습니다.
코트디부아르, 키르기스스탄, 방글라데시 등 일부 국가는 법 개정을 통해 무국적 상태를 해소하거나, 소수민족에 대한 시민권 부여 확대 정책을 시행해왔습니다. 또한, NGO와 시민단체들은 출생등록을 지원하고, 법률 상담, 교육 캠페인을 통해 현지 공동체의 권리의식을 높이고 정부의 책임을 촉구하는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갈 길은 멉니다. 정치적 민감성과 보수적인 국가주의 정서로 인해, 무국적자 문제는 여전히 회피되거나 축소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따라서 지속적인 국제적 압력과 감시가 필요하며, 시민사회의 연대와 공감도 필수적입니다.
무엇보다 소수민족의 국적 문제는 단지 행정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적 차별과 정치적 폭력이 만들어낸 구조적 문제임을 인식해야 하며, 해결은 ‘동정’이 아니라 ‘정의’의 관점에서 접근되어야 합니다.결국, 국적은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보장받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입니다. 그리고 그 권리로부터 배제된 소수민족 무국적자들의 삶은 우리 사회가 다문화, 다민족의 존재를 어떻게 인식하고 수용하는지에 대한 척도가 됩니다. 그들의 존재를 보지 못하는 사회는 결국 자신의 존엄과 정의도 지켜내기 어려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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