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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국적 없는 사람들, 그들은 왜 존재하는가?
국적은 개인의 법적 정체성을 규정하는 핵심 요소이다. 그러나 전 세계 수백만 명의 사람들은 어떠한 국가로부터도 국적을 부여받지 못한 채 ‘무국적(stateless)’ 상태로 살아간다. 이들 중 상당수는 바로 소수민족 출신이다. 특정 민족에 속한다는 이유만으로 국가로부터 배제당하고, 존재 자체가 불법이 되어버린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은 국제사회가 직면한 심각한 인권 문제 중 하나다.
무국적 상태는 단순히 여권이나 주민등록증이 없는 것이 아니다. 학교 입학, 병원 진료, 은행 계좌 개설, 합법적 취업, 결혼 등록 등 기본적인 시민권조차 행사할 수 없는 법적 공백을 의미한다. 이처럼 국적의 부재는 곧 존재의 부정이자 생존권의 박탈이며, 특히 소수민족에게는 정체성 그 자체가 범죄시되는 억압의 근원이 된다.
이들이 무국적자가 되는 이유는 다양하다. 역사적으로 식민 지배나 내전으로 인해 국경선이 자주 변경되거나, 국가가 새롭게 탄생하면서 일부 집단이 국가 구성에서 배제된 경우가 있다. 또는 특정 민족에 대한 차별적 법률이나 인종적 배제 정책에 의해 의도적으로 시민권 취득이 불가능하도록 설계된 경우도 존재한다. 즉, 무국적 문제는 단순한 행정 오류가 아니라 정치적·역사적 억압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2. 국경 너머로 쫓겨난 소수민족 난민들
국적을 가지지 못한 소수민족은 종종 자국 내에서도 사회적 박해와 정치적 탄압을 받아 국경을 넘어 난민이 되는 상황에 직면한다. 그러나 이들이 도착하는 국가는 대부분 이들을 합법적으로 인정하지 않거나, 수용하더라도 제한적 지위와 열악한 조건을 부여한다. 결국 이들은 어느 나라에서도 ‘시민’으로 인정받지 못한 채, 법적 보호의 공백지대에서 살아가야 하는 난민 중의 난민이 되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미얀마의 로힝야족이다. 로힝야족은 수 세대에 걸쳐 미얀마 라카인주에서 살아왔지만, 미얀마 정부는 이들을 불법 이민자로 규정하고 국적을 부여하지 않았다. 결국 이들은 2017년 대규모 탄압과 학살을 피해 방글라데시 등 인접 국가로 피난하게 되었지만, 이마저도 ‘임시 수용’에 불과하며 정착권, 이동의 자유, 교육·노동권조차 보장받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유사한 사례로 태국의 카렌족, 쿠웨이트의 비두인족, 아프리카의 바투와족, 유럽 내 롬(집시)인들이 있다. 이들은 대부분 모국 내에서도 시민권을 인정받지 못하고, 난민이 되어 떠나더라도 제2국가에서도 국적을 취득할 수 없는 이중의 배제 구조에 놓여 있다. 이처럼 국적 없는 난민은 국경을 넘는 순간 ‘국가 간의 책임 공백’ 속으로 빠지며,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는 사각지대에서 존재를 연명하게 된다.
3. 무국적과 난민 정책의 한계
현행 국제법과 각국 난민정책은 여전히 무국적자 문제를 충분히 포용하지 못하고 있다. **UN 난민기구(UNHCR)**는 ‘무국적자 지위에 관한 협약(1954년)’, ‘무국적 감소 협약(1961년)’ 등을 통해 관련 보호 장치를 마련하고 있지만, 강제성 없는 권고 수준에 그쳐 실질적인 효과는 제한적이다. 많은 국가가 이러한 협약에 가입하지 않거나, 가입하더라도 국내법에서 이들을 보호할 수 있는 구체적 제도적 장치가 미비한 상태이다.
또한 무국적 소수민족에 대한 차별은 난민 수용 제도 자체를 어렵게 만들고 있다. 많은 국가는 난민 신청 시 출신국 확인, 신원 증명, 여권 등의 서류 제출을 요구하지만, 국적이 없는 소수민족에게는 이 모든 요구가 불가능한 조건이 된다. 이는 이들이 합법적 난민 절차조차 거치지 못하게 만들며, 결과적으로 비공식 체류자, 불법 노동자, 아동 노동자, 인신매매 피해자 등 극단적 취약 계층으로 전락하게 만든다.
더욱이 무국적자에 대한 사회적 인식 역시 부정적이다. 국적 없는 사람은 불법 체류자, 잠재적 범죄자, 사회 불안 요소로 낙인찍히는 경우가 많고, 특히 소수민족이라는 인종적 차별이 겹쳐지면서 이중의 배제를 경험한다. 이런 현실은 국제사회가 수십 년간 무국적자 문제를 인식해 왔음에도, 여전히 정치적 우선순위에서 밀려 있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4. 보편적 시민권을 향한 연대와 과제
무국적 소수민족의 문제는 인도주의 차원을 넘어, 국제 인권 질서의 근간을 흔드는 구조적 위협이다. 개인이 태어난 민족적 배경 때문에 국적을 가질 수 없다는 현실은, 현대 문명이 주장하는 자유, 평등, 권리의 보편성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그렇기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접근은 인종·정치·경제를 초월하는 전 지구적 연대를 필요로 한다.
우선 각국 정부는 자국 내 소수민족에 대해 국적 부여 절차를 명확히 하고, 차별 없이 시민권을 획득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특히 헌법이나 시민권법 내에 인종, 언어, 종교를 이유로 시민권을 박탈하거나 제한할 수 없도록 하는 규정이 필수적이다. 또한, 출생지주의(principle of jus soli)를 도입하거나 확대해, 국경 내에서 태어난 모든 아동에게 자동적으로 국적이 부여되는 방식도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
국제사회 또한 무국적 소수민족에 대한 실질적인 보호 체계를 강화해야 한다. UNHCR을 비롯한 국제기구는 단순한 난민 구호를 넘어, 국적 회복, 장기 정착, 교육 기회 제공, 법률 상담 등 실질적 권리 보장을 위한 프로그램을 확대해야 하며, 이를 위한 재정적·외교적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 특히 인권단체, 종교단체, 시민사회 등이 연대하여 이들의 존재를 사회적 의제로 끌어올리는 캠페인이 중요하다.
결국 국적은 단지 행정 절차가 아니라, 존재에 대한 사회적 승인이다. 우리가 누구인지, 어디에 속해 있는지를 결정하는 이 권리는 어떤 이유로든 부정되어서는 안 된다. 소수민족이 국적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은 그 사회가 특정 정체성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는 의미이며, 이는 국가와 공동체의 도덕적 기준이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를 보여주는 바로미터이다.
따라서 지금이야말로 ‘국경 너머로 지워진 사람들’을 다시 지도 위에, 법의 테두리 안에, 공동체의 품 안에 복원할 수 있는 사회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무국적이라는 공백은 누군가의 잘못된 선택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외면한 결과이며, 이제는 그 책임을 함께 나누어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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