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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다양성 위기의 시대, 주목받는 전통 지식
21세기 인류는 유례없는 생물다양성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세계자연보전연맹(IUCN)은 약 150만 종 중 10만 종 이상이 멸종 위기에 처해 있다고 밝히며, 이는 단순한 생태 문제를 넘어 식량, 의약, 기후조절 등 인류의 생존 기반을 위협하는 전 지구적 문제로 부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근 국제 사회는 과학 기술뿐 아니라, **소수민족과 원주민 공동체가 전승해온 전통 생태지식(Traditional Ecological Knowledge, TEK)**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소수민족 공동체는 오랜 세월 자신이 속한 생태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축적된 지식과 기술, 의례와 금기, 관찰과 실천의 체계를 가지고 있으며, 이는 단순한 전통의 산물이 아닌 경험 기반의 실용적 지식입니다. 특히 이들은 지역 생태계의 순환 구조, 종 간 상호작용, 자연자원의 지속 가능한 활용법에 대한 정교한 이해를 바탕으로 살아왔습니다.
이러한 생태지식은 현대 생물학이나 생태학이 발견하지 못한 정보를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생물다양성 보존을 위한 공동체 중심 접근법, 비자본주의적 자원관리 모델을 제공하며 국제 환경정책에서도 점차 비중 있게 다뤄지고 있습니다. 유엔 생물다양성협약(CBD)과 IPBES(생물다양성 및 생태계서비스에 관한 정부간 과학정책 플랫폼) 역시 전통 생태지식을 공식적인 보존 전략의 한 축으로 인정하고 있으며, 이는 지속 가능성과 문화 다양성의 접점을 찾는 실천적 전환으로 이해됩니다.
소수민족, 생물다양성 보존의 숨은 수호자
실제로 세계 생물다양성의 중심지인 열대우림, 고산지대, 해안 생태계 등은 소수민족이나 원주민 공동체가 거주하는 지역과 대부분 겹칩니다. 전 세계 육지의 약 20~25%가 이들의 전통적 거주지로 간주되며, 이 지역에는 지구 생물종의 80% 이상이 서식하고 있습니다. 이는 소수민족이 단지 자연 속에 살고 있는 존재가 아니라, 생태계의 회복력과 균형을 유지하는 적극적 관리자로 기능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아마존 열대우림의 원주민 부족들은 수천 년간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수렵, 채집, 농경을 병행해왔으며, ‘쉬프팅 컬티베이션(이동 농경)’ 같은 토지 순환 관리 방식을 통해 토양의 영양 순환과 생태계 다양성을 유지해왔습니다. 아프리카 동부 마사이족은 초지 생태계에서 가축의 이동 경로, 물과 풀의 계절성, 야생 동물의 습성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공존적 방목 체계를 구축해왔고, 이는 오늘날에도 지속 가능한 유목 모델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동남아시아의 다이족, 몽족 등은 물길, 숲, 논의 경계를 명확히 인식하고 그에 따라 자원을 이용하며, 공동체 차원에서 사냥과 벌목에 대한 사회적 규제와 전통적 의례를 통해 생물종 보호의 문화를 유지해왔습니다. 이들의 전통 생태지식은 과학적 데이터보다 더 정확하게 기후 변화, 생태계 붕괴의 신호를 인지하고 대처하는 능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소수민족은 단순한 ‘보호 대상’이 아니라, 생물다양성을 실질적으로 유지하고 있는 생태 파수꾼이며, 그들의 전통 지식은 과학기술 중심 접근만으로는 부족한 지구 생태계 관리에 있어 결정적인 보완책이 됩니다.
위협받는 전통지식과 공동체 기반
하지만 이러한 전통 생태지식은 지금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가장 큰 위협은 토지 상실과 문화 해체입니다. 대규모 농업 개발, 광산 채굴, 관광 개발, 댐 건설 등으로 인해 수많은 소수민족 공동체가 전통적 생활 터전을 잃고 도시로 이주하거나, 공동체 자체가 붕괴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지식의 전승이 단절되고, 세대를 잇는 생태지식이 사라지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현대 교육 시스템은 대부분 서구 과학 중심의 커리큘럼을 따르고 있으며, 소수민족 청년들에게 전통 지식은 쓸모 없는 낡은 것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가치관의 변화가 아니라, 전통 지식의 지위와 신뢰가 사회적으로 약화되는 구조로 연결되며, 궁극적으로 생태지식의 ‘사문화’를 가속화시킵니다.
더불어 상업적 생물자원 탐사(바이오 프로스펙팅)나 생명공학 연구에서는 소수민족의 지식을 무단으로 활용하면서도 정당한 보상이나 권리 보장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지식의 식민주의’로 비판받으며, 국제적으로는 생물유전자원의 접근과 이익공유에 관한 나고야 의정서가 이를 규제하고 있지만, 실질적 이행은 여전히 부족한 실정입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전통 생태지식을 지키기 위해서는 지식의 보호와 공동체의 자율성 보장, 문화 기반의 교육, 법적 권리 확보가 종합적으로 이뤄져야 하며, 이는 생물다양성 보존을 위한 가장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조건입니다.
새로운 생태 패러다임을 위한 연대와 제도적 과제
이제는 소수민족의 생태지식을 단지 보조적 자료로 취급할 것이 아니라, 국가적·국제적 생물다양성 보존 전략의 핵심 축으로 삼아야 할 때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지식의 권리화를 위한 제도적 기반이 필요합니다. 소수민족이 자신들의 지식을 보존하고 전승하며, 상업적 활용에 대해 주체적으로 관리하고 이익을 공유할 수 있는 법적 체계가 마련돼야 합니다.
둘째, 지역 중심의 공동체 기반 보존 모델을 확대해야 합니다. 이는 단지 자연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생태를 중심으로 한 전통 문화, 사회적 관계망, 가치 체계를 통합적으로 보전하는 방식입니다. 실제로 코스타리카, 볼리비아, 필리핀 등에서는 공동체 참여형 보존구역, 생물문화 보호구역(Biocultural Reserve) 등을 실험하며 현지인 중심의 생물다양성 관리 시스템을 제도화하고 있습니다.
셋째, 교육과 미디어를 통해 전통 생태지식의 가치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제고해야 합니다. 과학기술과 전통지식은 경쟁이 아니라 상호 보완과 융합의 관계로 접근해야 하며, 청소년 교육과 공공 캠페인, 언론 보도를 통해 전통 지식이 지닌 생태적·문화적 가치가 재조명될 필요가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생물다양성 보존은 단지 자연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연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어떤 삶의 방식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윤리적 선택입니다. 소수민족의 생태지식은 우리 모두가 마주한 생태 위기 속에서 지속 가능성과 공존을 실현할 수 있는 고유한 나침반이며, 이 지식이 존중받고 보호받을 수 있는 사회적 연대와 제도적 노력이 절실한 시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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